나의 이야기

향기로운 사람

에크하르트 2008. 8. 29. 12:52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안에 들어서자 진한 향수 냄새가 훅 끼친다. 혼자 탄 엘리베이터 안에서 빈 공간에 손을 휘저어 향을 뿌리쳐 보지만 막힌 공간에서 그 향이 없어질 리 만무하다. 다행히 엘리베이터는 12층에서 1층까지 순식간에 이동을 해서 문을 활짝 열어주고 나는 도망치듯 밖으로 나와서 크게 숨을 들이쉬어 본다.

 나는 향수 냄새나 진한 화장품 냄새를 아주 싫어한다. 특히 남자 화장품 냄새는 향이 진해서 화장품 냄새가 짙게 나는 남자 옆에서는 저절로 얼굴을 찡그리고 얼굴을 돌리게 된다. 그런 아내의 유별남 때문에 남편은 남자들이 사용하는 남성용 화장품을 쓰지 못한다. 결혼 초 향이 최대한 자극적이지 않는 남성화장품을 사용했던 남편은 결국 나의 사정어린 애원과 부탁으로 남성화장품과 결별을 하고 아내가 사용하는 스킨, 로션을 같이 사용해준다.

 요즈음은 향기 없는 게 없을 정도다 날마다 쓰는 비누, 샴푸, 치약을 비롯해서 빨래에 사용하는 섬유유연제, 집안에서 나는 나쁜 냄새를 없애준다는 뿌리는 방향제, 화장실에 꽂아두는 방향제를 비롯해서 심지어는 향기 나는 볼펜도 있다. 글씨를 쓰면 글씨에서 향기가 나는 것이다. 아이들 볼펜으로 글씨를 쓰고 종이에 코를 킁킁거리며 맡아보지만 나에겐 역시 기분 좋은 향은 아니다.

 내가 이런 인위적인 향을 좋아하지 않는 이유 중 하나는 화장품을 별로 사용해보지 않은 탓도 있다. 시골에서 나고 자란 나는 커오면서 엄마가 화장하는 모습을 거의 보지 못하고 자랐다. 여자 아이들은 자라면서 엄마 화장품으로 화장도 해보고 시뻘건 입술로 식구들을 놀라게도 하지만 우리 집엔 그런 화장품은 물론 없었다. 화장품 구경도 못해본 나는 그런 장난을 할 기회가 없었고 엄마는 늘 농사일에 집안일에 얼굴에 분칠할 기회가 없었다.

 내가 화장품을 처음 손에 넣어 본 것은 고등학교 졸업식 며칠 전이다. 화장품이라야 물론 스킨과 로션이 전부였지만 아마 화장품 회사에서 나왔던 것 같다. 고등학교 졸업하면 화장을 하게 되니 화장하는 방법도 알려준다며 샘플로 된 화장품을 나눠주었다. 집에 와서 냄새도 맡아보고 얼굴에도 발라보며 나도 이제 아가씨가 되었으니 화장을 해 보리라 다짐도 했었다. 그러나 샘플로 받은 스킨과 로션은 한참동안이나 사용했고 결혼하고 아이들을 낳아 기를 때까지 기초화장품 말고는 변변한 화장품을 사 본적이 없다. 물론 화장을 하지 않으니 그럴 수밖에.

 이런 이유로 나는 인위적인 향과 친하지 못하다. 남자 화장품 못지않게 여자 화장품도 향이 진한 것은 가끔 숨을 멈추게 할 때가 있다. 물론 향수는 나에게 더욱 치명적이다. 작년 가을 일본으로 여행을 다녀오신 시부모님은 자식들을 위해 각자의 선물을 챙겨오셨다. 열어보니 향수다. 딸이나 며느리 사다주면 좋아한다는 친구의 권유로 아버님은 큰돈을 들여 향수를 사 오신 거란다. ‘향기 좋네요. 감사 합니다’ 하고 향수를 가지고 와 화장대에 놓았지만 나는 아직 향수를 사용해 보지 못했다. 아니, 앞으로도 가끔 뚜껑이나 한번 열어보고 다시 닫을 게 분명하다.

이런 인위적인 영향 때문인지 요즘은 꽃향기가 별로 나지 않는다. 물론 도시 생활을 하는 탓도 있겠지만 자연의 향기가 느껴지지 않는다. 싱그러운 풀냄새, 달콤한 들꽃냄새, 짜릿한 바다냄새! 버스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리다 아파트 담장에 핀 장미꽃에 코를 대고 향을 맡아본다. 장미향이 별로 나지 않는다. 자극적이고 인위적인 향기에 취해서 살다보니 정말 향기로운 냄새는 맡지 못하는 걸까 하는 상상을 하며 코를 킁킁거려본다.

 좋은 인상을 가졌더라도 너무 자극적인 향수를 사용하는 사람에겐 가까이 다가서기 쉽지 않고 내면적인 아름다움을 알기 전에 먼저 저만치 거리를 두게 된다. 첫인상이 별로인 사람도 깊은 얘기를 나누고 서로 소통하고 상대방의 마음을 알게 되면 처음 생각했던 것보다 더 멋지고 아름다운 만남이 유지될 수 있는 것이다.

 두 시간의 외출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 엘리베이터안의 진한 향수냄새는 아까보다는 훨씬 줄어들었다. 그 대신 더운 날 계단 청소하느라 힘드신 청소아주머니의 땀 냄새가 난다. 진한 향수 냄새보다 싫지 않은 사람 사는 냄새다.